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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고3 모의고사 출제_최명익 무성격자 작품해설 줄거리 내용 작 작품정리

국어모의고사사전

by 국어벅스 2023. 6. 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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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고3 모의고사 기출 현대소설 - 최명익, 무성격자

 최명익의 <무성격자>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보여주는 심리소설이다. 최명익은 1930년대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던 지식인의 내면 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크게 두 가지의 작품세계로 나눌 수 있다. 해방 이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주로 식민지 상황에서의 지식인의 의식 과잉과 자아 탐구를 들었으며, 해방 후에는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면을 주로 고찰하였다. <무성격자>는 해방 이전 식민지 지식인의 자의식에 관한 소설이다. 작품에 나타난 죽음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주목하여 감상하도록 한다. 

 

(참고자료)

- 오주리, 최명익(崔明翊)의 「무성격자(無性格者)」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연구, 한국근대문학회(2015)

- 김예림, 최명익 소설의 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1994)

2023년 6월 고3 모의고사 기출-무성격자-최명익-작품해설

최명익 <무성격자> 작품 내용 작품 해설

 최명익  「무성격자」는 자포자기의 퇴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이 두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한 강한 의지력이 갖는 의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정일은 아버지와 애인 문주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시작한다. 정일에게 생활력과 의지력을 일깨워주는 인물로 그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구체적인 생활 감각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다른 작품에서 이러한 현실적인 생활 감각이 세속적인 것으로서 부정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여기서의 생활은 정일을 죽음에의 욕구와 친숙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정일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자신의 심리적 치유를 동반한다. 죽음에 대한 친숙감, 살고자 하는 의지력에 대한 경멸감으로 해서 비정상적인 심리를 보이던 정일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변화를 겪으면서 ‘슬픔’의 감정을 회복한다.

정일을 중심으로 벌어져 있는 두 세계는 아버지의 세계와 문주의 세계이다. 아버지가 현실적 삶의 영역에 있다면 문주는 퇴폐적인 죽음의 영역에 있다. 「무성격자」는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뿌리깊은 우울과 병적 퇴폐의 분위기에 취해 있던 인물이 심리적 갈등을 거치면서 삶의 긍정적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지난한 고뇌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작가가 제시하는 ‘삶’ 또는 ‘삶의 의지력’의 의미가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최명익 <무성격자> 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최명익의 <무성격자>에 나타나는 죽음은 두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는, 문주(紋珠)’와 ‘아버지’라는 두 인물이 만들어내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일(丁一)’의 의식 속에서 간접적으로 체험되는 내면화 된 죽음이 그것이다. 전자는 외부세계, 즉 현실에서의 죽음이며, 후자는 내부세계, 즉 의식에서의 죽음이다. 이 작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의 죽음, 즉 내부 세계에서의 죽음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에 의해 기록됨으로써 내면의 예술로 승화하는 죽음이다.

 

최명익 <무성격자> 의식의 흐름 기법, 심리소설 특징

 이 작품은 의식의 흐름 계열의 심리소설이 그러하듯, 서사구조 자체가 크게 중요시 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행위가

중심이 되는 외면적 인간이 아닌, 심리적 실재로서의 내면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i) 다시 눈을 감은 정일이는 자기의 피폐하고 침퇴한 뇌에로 폐물이 발호하는 현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생각이 마치 여름날 썩은 물에 북질북질 끓어오르는 투명치 못한 물거품 같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 괴로웠다.

(ii) 한나절 후에 보게 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의 신음 소리, 오래 앓는 늙은이의 몸 냄새, 눈물 괸 어머니의 눈과 마음 놓고 울 기회라는 듯이 자기의 설움을 쏟아 놓을 미운 처의 울음소리, 불결한 요강……그리고 문주의 각혈, 그 히스테릭한 웃음과 울음 소리……

(iii) 이렇게 주검의 그림자로 그늘진 병실의 침울한 광경과 이그러진 인정의 소리가 들리고 보이었다. 혹시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생각이 한 순간 머릿속의 훤화를 누르고 떠오르기도 하였으나 마음에 반향을 일으키는 아무런 여운도 없이 사라지거나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이렇게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말에 감상적 여운을 들여서 감정 유희를 해보려는 자기를 빙그레 웃게 되기도 하였다. 그 때마다 이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는 것은 삼십이 가까운 자기 나이 탓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여 보는 정일이는 두들겨도 소리가 안 나는 벙어리 질그릇 같이 맥맥한 자기의 마음이 더욱 무겁고 어둡게 생각되었다.     - 최명익, <무성격자> 부분 

 

(i)에서 정일의 눈을 감는 행위는 외부 현실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제 인물의 시선은 자기의 ‘피폐하고 침퇴한 뇌’로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시선을 내면으로 전환한 것이다. 죽음이라는 외부적 사건은 이 순간부터 의식의 내부로 들어 와 개인의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으로 융해된다. 이제 죽음은 정일의 정신 현상 속에서, 합리적인 언어로 정제되기 이 의식의 흐름의 작가가 내면세계의 정신활동을 사적인 내밀한 것(privacy)으로 다룰 때 실재 의식의 결을 보여준 후 의미화 단계로 넘어가야 신뢰감을 얻는다.

 <무성격자>에서 그것은, 내부 독백의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성취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전술한 바와 같이, 사건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정일이라는 인물의 의식의 내밀함 속에 어떠한 형상으로 떠오르며, 이에 대해 그가 어떻게 심리적으로 반응하는지가 문제되는 죽음이다. 여기서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내부 독백이라는 기교의 도입에 있어서도, 그것이 얼마만큼 깊은 층위의 의식까지 침투했는지, 그 의식의 결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간접 내부 독백과 직접 내부 독백이 번갈아 사용됨으로써, 내밀한 의식의 결의 변화가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최명익 <무성격자>시점의 특징

 <무성격자>는 전체적으로 3인칭 시점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전지적 작가에 의해 서술이 되다가도, 전지적 작가가 침범할 수 없는 인물의 의식을 표현할 때는 내부 독백으로 변화한다. 내부 독백 가운데서도, 인물이 자신의 의식의 표층에 떠오르는 언어들을 논리화 하긴 힘들어도 독자들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지 않을 만큼, 의식의 명료성을 유지하고 의사소통을 시도 할 때 간접 내부 독백이 사용되며, 이보다 더 깊은 의식의 심층과 무의식적 층위에 접근하려 할수록, 통사론적 구조가 해체되며, 시적인 수사법이 강화된다. (ii)의 경우, 전형적인 직접 내부 독백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통사론적 문법 구조가 어절 단위로만 남아 있으며, 어절과 어절 사이는 쉼표와 말줄임표와 같은 기계적인 구두법에 의해 연결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두법에 의한 연결은, 의식 작용에 있어서는 자유연상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국 하나의 시각적 몽타주(montage)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서술 기법으로서의 내부 독백은, 마음의 눈을 따라 시각적 이미지를 구성해내는 일종의 ‘심안(心眼)의 시계(視界)’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의식의 심층에서 논리화되기 이전의 이미지 자체로 제시되는 죽음은, 의식의 내밀함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된다.

 

최명익 <무성격자>두 병인(病人)의 모습- 아버지, 연인 문주의 죽음

 <무성격자>의 작품의 도입부와 결말부는 주인공 정일의 아버지와 연인인 문주, 두 인물이 죽어간다는 통보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죽게 되었다는 통보로 마친다. 죽음에 대한 통보는, 타인을 대신하여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정일의 의식 속에서 현재화시킨다.

그런데, 죽음은 단지 정일의 의식의 차원에서만 현재화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실존적 의미에서 이미 인생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현 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은 항상 죽음을 향한 존재로, 죽음에 의해서만 삶의 본래적 의미를 깨닫지만, 이는 삶의 본래적 기분으로서의 불안(sorge)에 의해서이다. 죽음에의 존재의 이러한 측면을 상징적으로 은유화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병인(病人)이다. 평생에 걸쳐 죽음에의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을 압축된 시간 가운데 죽음에 이르는 육체적 병을 가진 구체적인 인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결핵에 걸린 문주와 위암에 걸린 아버지의 두 죽음은 각각 의미론적 대립 구도를 형성하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죽음의 의미를 이원화시켜 보여 주고 있다.

 정일의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존재로서 병인이다. 그에게 있어서의 병은 진행형으로서의 죽음이다. 그러나 삶 속에 죽음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죽음 속에 삶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벌써’라는 부사어, 즉 때 늦음을 암시하는 이 부사어는, 죽음으로 가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힘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강인한 생존본능이다. 아버지의 삶에의 의지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본능이 완전히 폐퇴한 죽음의 직전의 순간에조차 삶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말하자면, 본능을 능가하는 힘이 존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의 본래성에 가닿지 못한 세인(世人)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의 일생은 오직 돈을 위하여 분망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인생을 반성하기에는 너무도 교양이 없었고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과인하게 정력적이었더니만큼 갑자기 닥쳐온 죽음을 대할 때 창황망조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 정일이의 눈에는 고통과 절망으로 울부짖는 아버지가 보 이는 듯도 하였다. - 최명익, <무성격자> 부분 

 

 그것은 바로, 생존본능과 결합되어 생리화한 돈의 논리이다. 이윤추구를 위해 자신을 무한히 확대 재생산하는 자본의 논리가, 아버지 특유의 강인한 생존본능과 결합하여, 죽음조차 지연시키는 강한 저항력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까지 생존의 논리로 저항하고 있는 아버지의 죽음은 생존논리에 집착하는, 하이데거 철학 내의 의미에서 세인의 종말로서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라캉이 의미하는 자연적 죽음에 불과하다. 죽음으로서 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바가 없다.

 

 문주 역시,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병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의 병은 진행형의 죽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라캉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한 인간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미로서의 죽음이다. 문주는 동경에서 무용을 한 바 있다. 무용은 안무와 동작에 의해 예술

이 되지만, 무용을 하는 무용수 자체가 예술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무용수인 문주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의 한 부분으로서의 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문주의 외양에서부터 문주는 정일에게 사랑의 대상이기에 앞서 심미적 대상이 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병적인 용모는 현실로부터 철저히 외면된 자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이러한 비현실적이고 비생활적인 이미지는 정일에게 천상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연인을 이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문주가 정일을 사랑하는 이유도,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측면은 전혀 없다. 다만,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운명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이 두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된다. 문주는 정일이 자신이 함께 죽어달라고 부탁할 때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랑하며, 정일 또한 그녀가 함께 죽자고 부탁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랑한다. 두 사람의 현실의 논리와 생존의 논리를 반(反)하고 있다는 데서 그 심미적인 근거를 찾수 있고, 한마디로, 이 둘은 삶 자체를 예술화 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두 사람이 말하는 죽음이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상징적 죽음으로서의 제2의 죽음이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갈망은 역설적으로 삶의 허무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다. 즉 존재의 무화를 통해 오히려 새로운 탄생을 원한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새로운 탄생이란 존재의 본질을 스스로 현성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상징적 죽음은 존재의 본질이 시적으로 구현된 예술로서의 삶이다.

 

최명익 <무성격자> 제목 '무성격자'의 의미

 함께 죽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랑하게 된 정일과 문주는 막상 동반 자살에 이르지 못한다. 문주는 오직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만 가져감으로써 존재의 본질과 괴리된 세인으로서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원리, 즉 현실의 논리, 돈의 논리, 생존의 논리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정일이 방황하도록 방치한다. 정일의 심리를 자의식적인 데서 방관자적인 데로 옮겨갔다고 본 해석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타당하다. 지식인과 예술가로서의 정일은, 아버지의 자연적 죽음으로 대변되는 생존의 논리와 문주의 상징적 죽음으로 대변되는 미의 논리 사이에서 방황하다 육체는 생존의 논리에 영혼은 미의 논리에 맡기는 분열적 양상을 보인다. 그가 지식인, 예술가로서 현실의 벽에 부딪혀 남아 있는 삶이 더 이상 삶으로서의 의미가 없는 죽음과 다름없었을 때, 문주와 함께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 자체를 미적인 것으로 승화시켜야 하였으나, 유약한 지식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죽을 기회조차 잃어버린다. 이로 인해 정일의 자아는 분열되고, 의미를 생산할 수 없는 의식의 흐름 위에 단지 이미지의 흐름을 안고 사는 존재, 삶의 본래적 의미를 얻는 데 실패한 죽음을 향한 존재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무성격자적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존재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 최명익 자신의 또 다른 분신적 주인공들을 통해 좀 더 극단까지 변용된다.

 

최명익 소설의 지식인의 모습

최명익의 소설들은 지식인의 자의식을 섬세한 심리묘사에 의해 그림으로써 그들 집단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을 집요하게 천착한다. 「비오는 길」의 병일, 「무성격자」의 정일, 「역설」의 문일, 「페어인」의 현일, 「심문」의 명일 등에서 보듯 그의 소설 주인공들은 그 이름만큼이나 비슷한 성격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로, 모두 절망과 불안과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는 지식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은 ‘행동한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 과잉 상태에 빠져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지식인이라면 의당 사회의 발전을 유도할 수 있는 계급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론과 룸펜 인텔리의 자유주의적 속성에서 오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 사이에서 자기 존재가 찢겨지는 듯한 고통을 맛보는 의식 분열자들인 것이다. 최명익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자기분열은 ‘행동’에 대한 지나친 결벽증을 가져오고 이러한 결벽증은 다시 자신에 대한 혐오를 유발하는 악순환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이들은 퇴폐적이고 타락한 자기 자신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들의 삶에 대한 역설적인 태도는 이제까지의 소설에 나타나는 지식인상을 반성하고 그 허위를 벗겨 내는 구실을 함으로써 우리 소설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다.

최명익의 생애

최명익. 호는 유방(柳坊). 1903년 7월 14일 평양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평양 인천 사이를 배로 내왕하며 주로 산삼 등을 교역하여 무역으로 재산을 모았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최명익에게는 퍽 다감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최명익은 14세의 나이에 평양고보에 입학하였고, 15세 되던 그 다음해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일찍 돌아가신 탓으로 정신적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없었다고는 하나 최명익이 최초로 이야기책에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랑채에 각설쟁이를 불러다가 「삼국지」를 듣던 아버지의 취미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에게 문학적 취미를 심어준 것이 그의 아버지였다면, 민족의식을 싹트게 해준 것은 그의 소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최명익은 소학교 1학년 때 한일합방을 맞이하였는데, 당시 그가 다니던 소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으로, 학생들에게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에 관한 책을 읽히다가 일본 헌병대에 붙들려가 옥사하였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최명익은 어린 나이지만 ‘망국노’의 서러움을 느끼며 민족 의식을 키워 나갔다.

최명익의 본격적인 문학 수업기는 일본 유학 시절인 1921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유학을 통해 다양한 문학적 영향을 접한 최명익은, 1928년 홍종인, 김재광, 한수철 등과 순문예 동인지 「백치」를 간행한다. 최명익이 중앙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것은, 1936년 『조광』에 발표 된 「비오는 길」을 통해서이다. 1928년부터 1935년 까지의 문단 상황을 보면, 제1차 방향전환으로부터 해산계 제출에 이르기까지 KAPF문학의 전성기이자 수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36년에 발표된 「비오는 길」을 시작으로 1941년 발표된 「장삼이사」에 이르기까지, 다작은 아니지만 꾸준히 창작활동을 계속 하였다. 최명익은 해방 후에도 계속 평양에 남아, 전재경 등과 함께 ‘평양예술문화협회’를 조직한다. 순수 문학을 목적으로 한 이 단체는 북한에서 가장 먼저 생긴 문학단체였으나, 김사량을 위원장으로 한‘평남지구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에 흡수되어, 1946년 10월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이 창립된다. 6.25이후 1954년부터 자료준비에 들어가 2년간의 집필기간을 거쳐, 1956년 장편 역사소설 「서산대사」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최명익은 역사물에 눈을 돌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단편 역사소설 「신라무사의 이야기」, 「고주몽」, 「강감찬」등을 발표하였다.

최명익의 작품 세계

 「비오는 길」, 「무성격자」의 병일, 정일은 직업을 갖고 있으되 흥미를 잃고 있으며 예술가 타입으로서 결벽성을 지닌 인물들이다. 「비오는 길」의 병일과  「무성격자」의 정일은 ‘생(生)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부단히 갈망하지만 주관적 관념의 칩거로 인해 삶을 그 자체로 온전히 보내지 못한다. 「심문」에 이르면 작가는 「비오는 길」, 「무성격자」에 흐르던 추상을 부정하고 이념과 현상의 매개속에 생성되는 구체성을 담지하고 당대의 위기였던 실직이나 전향의 주제를 사건으로 취급하게 된다.「심문」이후 2년의 공백기를 거쳐 발표된 「장삼이사」는 작가 의식의 전환점으로써 작중 지식인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타자를 끊임없이 바라보는 방식(showing)을 취한다. 「장삼이사」의 주인공 ‘나’는 이전에 보여주던 내부세계 편향(telling)이 아닌 외부세계 그 자체를 그대로 바라보며 주관적 관념으로 삶(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허위의식을 조소하게 된다. 최명익의 해방 전 작품 「비오는 길」에서부터 「장삼이사」에 이르는 문학 세계를 미루어 볼 때, 해방 후에 쓰여진 『서산대사』는 해방 전 최명익 문학과 연계점을가지며, 작가의 삶을 집요히 성찰하는 성숙의 결과이다.

 『단층』파의 특징인 타락한 인텔리의 고민과 그것의 신비화나 인간심리자체의 기묘함(자기 복수애의 충동)을 동시에 포괄하면서 이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가가 최명익이다. 평양의 백치(1928)동인으로 출발. 단편 「비오는 날」로 그 역량을 드러낸 작가 최명익은 『단층』파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지는 않았다. 『단층』파란, 동인지(1937.4~1938.3, 모두 3권)에 가담한 동인들을 가르키는데 유항림, 김화정, 김이익, 이휘창, 김여창, 양운학, 김화민, 최정익, 구연묵, 김조규 등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들의 특징은 평양중심주의와 소설중심주의로 요약된다. 1903년 평양태생인 그의 나이로 보면 김팔봉, 정지용과 동갑이고 김기림 임화보다는 4, 5년이나 연장인 만큼 김이석(1914)세대와는 10여년의 격차가 있는 처지이다. 그럼에도 최명익이 『단층』파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은 웬 까닭일까. 「비오는 날」에서 비롯 「무성격자」(1937), 「심문」(1939), 「장삼이사」(1941)를 검토함으로써 비로소 그 해답을 얻어낼수 있다.

최명익은 당시의 부진하는 지식인의 정신적인 상태를 그리는데 심리주의 기법을 사용하여 작품 전체에 통용시키고 있다. 이것은 작가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갈등을 표면화하기 어렵게 되자 소설 속에 주관적 특성이 강화되어 인물들의 행동적 적극성이 약화된 반면 심리적 갈등으로 당대 현실과의 대립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문예이론의 활발한 유입과 더불어 작가의 소설 미학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면서 모더니즘 소설이 활발히 전개된다. 최명익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는 1988년 월북작가 작품의 해금조치가 있은 후에 이르러서야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명익 소설의 모더니즘적 기법

최명익은 현실을 파악함에 있어 모더니즘적 기법을 수용하여 실의에 찬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들의 음울한 삶을 제시하며, 도시를 퇴폐와 소외의 공간으로 보고 있으며 그것은 소설 속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문명 비판 의식이 잠재되어 나타내고 있다.

최명익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인물, 동물, 죽음, 물, 길 등의 이미지를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어떤 감각적 인상에 의하여 전달되는 하나의 수사적 기법으로 내밀한 의식을 제시하려고 할 때 부딪치게 되는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작가의 노력에서 빚어지고, 무엇보다도 해석에 도움되는 중요한 장치이며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과 함께 정서 환기의 구실을 한다.

상징이미지로 대두되는 ‘죽음’과 ‘길’은 최명익 소설에서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죽음’은 최명익이 작품의 결말에서 자주 쓰는 방법으로 일말의 사건의 해결책 구실을 해준다. 그리고 ‘자연사’보다는 ‘병사’나 ‘자살’이 대부분이다. ‘길’은 공간적 이미지로 최명익 작품에 자주 등장되고 있다. 대체로 무의미한 반복 혹은 부정적 의미지로 상징되고 있다. 「비오는 길」, 「무성격자」에 나오는 ‘길’은 무의미한 이상적 삶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무의미한 길은 주인공 내면의 모습을 펼쳐 주는 공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길’을 오가면서 무수한 갈등을 겪지만 결국은 자의식이 강한 성숙되어진 인물로 태어나게 하는 시련의 장소이기도 하다.「비오는 길」에서의 ‘길’은 길을 걷는 것에서 시작하여 길을 걷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데, 이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인생의 여로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무성격자, 「심문」의 ‘길’은 운명적 예감이 기다리는 우울한 삶을 향한 공간으로, 「장삼이사」의 길은 열차의 속도감과 함께 관념 유희의 공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명익의 해방 후 리얼리즘

최명익은 심리주의적인 도스토예프스키류에 깊게 빠져 있던 그의 생각들이, 해방 후 다시 사실주의적 톨스토이의 문학관에 영향을 받는다. 그는 평양에서 광복을 맞은 재북 작가로서, 머지 않아 곧 북한의 체제에 예속되기에 이른다. 그러자, 그의 문학관은 자연 북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최명익의 모더니즘적 세계관은 1920년대에 이미 유학 생활과 습작기를 통해 형성되기 시작하여, 1930년대에 그의 독립된 문학적 태도로 정착되고 고착되어졌는데,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서, 작품속에 드러나고 있다. 최명익이 광복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그의 기질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의식의 변모였다.

북한 문학의 내용은 사회주의를, 형식에서는 민족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대중성을 함께 강요한다. 박태원(갑오농민전쟁)과 마찬가지로 최명익은 북한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역사 소설 「서산대사」에 착안했다.

 

최명익의 다른 작품 <비오는 길> 작품 내용

「비오는 길」은 병일이라는 한 인물의 폐쇄된 자의식을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병일은 성밖 빈민굴에 살면서 맞은 편 성밖에 있는 공장에 사환 겸 사서로 근무하고 있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집에서 공장에 이르는 길을 왕복한다. 병일에게는 길의 출발점이자 회귀점인 그의 거주지인 빈민굴의 한 셋방과 그 맞은 편의 공장은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공간이다. 다만 끊임없이 갔다가 와야 할 곳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길을 이루는 곳으로만 의미가 있다. 즉 구체적인 생활장소로서의 빈민굴이나 공장이 아니라 병일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추상적인 보편성으로서의 공간이다.

이 소설에서 병일이 관계를 맺는 유일한 인물이 처마 밑에서 비를 긋다가 만난 사진관 주인 이칠성인데, 그는 사진관이 잘 되어 처자와 단란한 생활을 하기를 꿈꾸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이칠성의 삶의 방식에 대해 병일은 속물적인 삶이라고 경멸하면서도 자신감에 차 있는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동경하는 이중적 태도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세계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관계 속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기에 또 다른 소시민적 개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비오는 길」에서 세계는 주인공의 분열된 자의식으로 착색되어 있으며, 그 자의식의 분열이란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속물스런 삶에 대한 비판과 동경의 이율배반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런 삶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꿰뚫지는 못하고 그에게 현실은 낯선 사물이거나 '보편적인 인간조건'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세계와 인간의 관계는 '나'는 나, 너는 '너'라든지 '함께 할 수 없음'이라는 식으로 묘사되면서,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고독, 소외의식이 특정한 상황에 놓인 인간 존재의 특수한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이런 주관적인 인식은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존재로서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면서, 인간이란 원래 고독하고 비사회적이며 다른 인간존재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모더니즘의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고독감,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타인의식은 이 시기 최명익의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최명익의 다른 작품 <심문>작품 내용

 「심문」의 중심내용은 표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 현혁의 무너져내림이며 심층적으로 현혁의 애인이며 하얼빈의 카페 댄서인 여옥의 무너져내림이다.(자살) 고아출신인 여옥은 동경유학을 거친 미모의 여인 당대의 좌익 이론가 현혁의 애인이었다. 그러나 전락하여 술집 여급으로 평양까지 흘러왔고 이때 작중화자인 ‘나’와 만난다. 화가인 ‘나’는 상처한 직후라 그 공백을 여옥으로 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옥은 왜 하얼빈으로 도망쳤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나’의 미지근한 태도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출옥한 옛애인 현혁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 하얼빈으로 간 것도 두가지 이유 였는데여옥이 거기 있음이 하나이고 평양에서의 어중간한 삶이 자세를 청산하고 새 출발을 모색하기 위함이 다른 하나이다. ‘나’의 직업이 화가라는 것. 그것에 알맞은 현란하고 분위기가 작품 전체의 상당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방, 마담 카페 댄서의 생활이 술기운과 담배연기 속에 자욱한 짙은 이국 정취의 분위기 묘사 역시 모더니즘의 표층적 현상이다. 이러한 표층적인 현상아래 잠겨있는 ‘나’의 삶에 대한 결정불가능의 이중적인 모순된 성격과 여옥의 이중적인 모순된 성격이야말로 최명익 소설의 깊이를 증거한다. 모더니즘 소설의 뚜렷한 기법은 「심문」에서 제일 뚜렷한데 세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먼저 현혁의 경우 애인 여옥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나에게 돈으로 팔아 먹겠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그녀는 두 남자사이에서 죽음의 카드를 내 놓았는데 이는 인생 자체를 향한, 더없이 침중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의 역설은 여옥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잃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왕년의 마르크스주의자 현혁의 심리, 여옥의 두 남자를 향하는 심리, 그리고 그 두 인물을 바라보는 화자인 중년의 사내 ‘나’의 심리를 심도 있게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본질 탐구에 나아간 것인데 이것만으로도 우리 소설사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한 타락한 지식인의 정신적 파멸이 초래하는 비극적 상황을 다루고 있다. 현혁은 인격의 해체를 경험하는 인물이다. 인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취향, 의무, 자신에 대한 충실성과 타인과의 유대감 사이의 적대 관계가 심화됨으로써 개인은 그 자신의 본질 및 가치를 상실하고 마는데 현혁이 바로 그러한 인물로서,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단지 자신의 비열한 욕망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또 서로 동조하고 이해한다. 이는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절망과 내면적 혼돈 때문인데 인물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과거 지향적 태도와 감정상의 극심한 혼란이 그것이다. 복잡한 심리적 교차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의 불안하고 황폐한 내면 모습이다. 이 점은 특히 현혁에게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며 그것은 자아 탐구와 성찰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지식인이 갈 수밖에 없는, 가장 비참한 길로 통한다.

 

최명익의 다른 작품 <장삼이사>작품 내용

 「장삼이사」는 제목 그대로, 삼등 열차를 타고 가면서 화자인 '나'가 여러 세속인들[張三李四]을 그려낸 세태소설이다. '나'가 앉아 있는 주위에 중년 신사, 캡을 쓴 젊은이, 가죽 재킷, 당꼬바지, 곰방대 영감, 촌마누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등이 함께 있다.

한 젊은이의 실수로 중년 신사에게로 시선이 모아지고, 그의 옆자리에 있는 여자에게로도 관심이 집중되고, 드디어는 그 중년 신사가 북지에서 갈보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고, 달아났던 여인을 다시 찾아 지금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드러내는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간에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화자인 '나'는 그들을 '당꼬바지', '곰방대 노인' 등의 사물화된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심리 파악의 섬세함에 있다. '여자 장사'라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사람이 많은 기차 안에서 자신의 체험담을 넉살좋게 떠들어대는 장면, 도망치다 잡혀온 여자에 대한 속물적 호기심으로 그들(인신 매매범)의 타락한 언행에 주위 사람들이 동조해 가는 과정 등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천한 그 '여자'를 은근히 놀리면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정신적 횡포를 즐기는 주위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심한 역겨움을 느끼는데, 그 과정의 리얼리티는 이 소설의 가장 빛나는 대목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인 '나'는 '나'의 자의식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관찰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현실은 '나'의 자의식적 판단을 넘어선다. 예를 들어, '나'는 그 '여자'가 청년에게 당한 모욕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와서 '옥주년'이 잡혔으니 만나면 즐거울 것이라고 태연히 말한다. 뻔뻔스러울 만큼 끈질긴 그 '여자'만의 현실 인식 방법이고 생명력이다. '나'는 껄껄 웃어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도 억제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몸과 정신을 잃고, 또는 더럽히면서도 생존하고 있는 당대 삶의 실상이 '나'의 주관적 해석과 관계없이 제시되는 것이다. 해방 후 리얼리즘으로 나아간 작가의 변모는 「장삼이사」에서 그 모습이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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