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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학년도 9월 모평 고3 모의고사 출제-문의당기-서영보-고전수필-전문-핵심정리-해설-분석

국어모의고사사전

by 국어벅스 2023. 9. 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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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고3 모의고사 출제 고전수필 「문의당기(文漪堂記)」 서영보

 고전수필 「문의당기」(서영보)는 이 작품을 통해 관점을 달리하면 서로 다를 바 없는 매한가지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상대적 관점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신위라는 벗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문의당'이라 칭하는 집 이름에 대한 기록에 관한 글이다. 이 글의 구성은 '신위의 생각'-'나'에게 기문을 요청함'-'나'의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벗인 신위가 당호를 '문의(물결무늬)'라고 이름 지은 발상에 동의하고 있다. 신위는 사람들은 모두 물 가운데 있는 존재일 뿐이므로 그 물 가운데 지은 자신의 사당을 물 위의 물결인 '문의'라 이름 짓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위의 발상에 대해 글쓴이 서영보는 '어찌 유독 그대의 말에만 의심을 품겠소?'라고 답하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상대적 관점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 서영보는 상황에 대해 발상을 전환하면 '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도 눈길을 돌려 물 위에 사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과 '물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 사람(도성 안에 사는 사람)도 눈길을 돌려 물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고 있다. 

 

[주제] 고정관념을 벗어난 상대적 관점에 대한 생각, '문의당'이라 칭한 당호에 대한 기록

 

2024학년도 9월 모평 문의당기 서영보 작품해설

 

 

 

서영보,  「문의당기」 핵심 정리

· 작자: 서영보 

· 갈래: 한문 수필, 기(記)

· 성격: 교훈적, 비유적, 상징적

· 제재: '문의당'이라는 당호를 소재로 한 기록

· 주제 : 고정관념을 벗어난 상대적 관점에 대한 생각

· 특징

①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통념을 깨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② 비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개성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③ 편지의 형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④ 의문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⑤ 유추의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2024학년도 9월 모평 작품해설

 

9월 모평 26번 문제 해설

9월 모평 26번 문제

 

[문제 해설]

 ⓐ신위(벗)와 ⓑ'나'(글쓴이)의 관점에 대한 이해를 문제이다. 한문 수필의 종류인 '기(記)'는 경험에 대한 기록과 생각이나 관점에 대한 이유를 밝힌 글이라는 특성에 주목하여 출제한 문제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글쓴이와 대상의 관점을 묻는 문제의 핵심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는지, 대립(상반)되는지,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으며, '나(글쓴이)'는 벗인 '신위'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면 서로 다를 바가 없는 '반걸음을 움직인 것이나 천 리를 간 것이나 매한가지다'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즉, 도성 안에 살든 바다의 섬 가운데 살든 물 위에 사는 존재로 다를 바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의 생각을 드러내는 표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위(벗)의 관점

· 경험: 도성 안에 살고 있음. 천성이 물을 좋아하나 볼만한 샘이나 못이 없어 물을 볼 수 없음.

· 생각: 비록 물을 보는 법을 알고 있어도 써 볼 데가 없는 것 → 아쉬움 

· 생각의 전환, 깨달음: 천하의 지도를 보고 깨우친 점→ 천하만국에 두루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물 가운데 있는 존재일 뿐이다.

· 따라서, 집의 이름을 '문의'(물결무늬)라 칭함. 즉, 나는 물 가운데 있는 존재이므로 내가 사는 집은 '문의'라 칭할 수 있다. 

 

ⓑ'나'(글쓴이)

· 경험: 신위의 생각(→ 실물은 없으면서도 이름을 차지하는 경우가 '문의'라 당호를 칭한 것이라 함.)

· 생각: 바다의 섬 가운데 집을 짓고 사는 섬사람 중에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사는 사람도 있음 → 물을 가까이 접하지 않는다고 하여, 물에 사는 게 아니라 한다면 옳지 않음. 즉, 물에 산다고 한다. 이러한 이치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도 신위와 동일함. 따라서 '나' 역시 신위의 생각에 대해 동의함. 

· 깨달음: 대지는 하나의 섬이고, 세상 사람들은 섬사람이다. → 즉 모두 물 가운데 있는 존재나 매한가지다. 

비록 배를 집으로 삼아 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눈을 한곳에 두고 꼼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 눈길을 돌리는 순간이 있다. 즉, 물 위에 사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따라서, 비록 물을 보는 법을 알고 있어도 써 볼 데가 없다는 신위의 생각은 곧, 물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는 결론에 이름. → 즉, 도성 안에 살아도 물 위에 산다고 생각할 수 있다. 

· 따라서, 집의 이름을 '문의'(물결무늬)라 칭한 것에 대해 동의함. 즉, 생각을 전환하면 서로 다를 바가 없음. 모두가 물 가운데 있는 존재이므로 '문의'라 칭할 수 있다. 

 

 

① ⓐ신위는 물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발상으로 사고를 전환함.

② ⓐ신위에 대해 ⓑ'나'가 동의함. 물 가운데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임. 따라서 '배를 집으로 삼아' 사는 사람과 집에 '들어 앉아 사는 사람'의 상황은 생각을 전환하면 서로 다를 바가 없음. 이 작품에서는 이것이 핵심! 생각을 달리함에 따라 상황의 차이가 없다라는 관점이다. 즉, 바다의 섬 가운데 살든, 도성 안에 살든 대지는 하나의 섬이고, 세상 사람들은 섬사람이므로 모두 매한가지다. 따라서 적절하지 않은 서술은 ②번이다.

 

③ ⓑ'나'는 관점을 달리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섬에 살고 있다고 봄.

④ ⓑ'나'가 ⓐ신위의 발상에 대해 동의함. '사람들'의 판단 역시 그러함. 

⑤ ⓑ'나'는 발상을 전환하면 '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도 눈길을 돌려 물 위에 사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과 ⓐ신위가 '물을 보는 법을 써 볼데가 없다' 하는 것은 '물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 사람(도성 안에 사는 사람)도 눈길을 돌려 물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고 봄. 즉, 관점을 달리하면 서로 다를 바 없는 매한가지임.  

 

 

 

 

 서영보 「문의당기」  전문 내용, 원문

 큰 대륙도 결국은 바다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섬이다. 작은 섬에 산다고 섬사람이라 놀리지만 육지라고 하는 것도 크게 보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일 뿐이다. 그래서 물이 보이지 않는 한양의 도성 안에 집을 짓고 살면서도 스스로 섬에 살고 있는 양 찰랑거리는 물결을 바라본다고 선언한 사람이 있었다. 제 집 이름을 문의당(文漪堂)이라 붙여 놓고 그렇게 상상으로 물결을 보았다.


신한수(申漢叟)(=신위)가 제 집 이름을 문의당(文漪堂)이라 하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내 품성이 물을 좋아하기에 늘 도성 안에 볼 만한 샘이나 못이 없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소. 비록 물을 바라보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시행할 곳이 없었소. 그러다 천하의 지도를 보다가 터득한 바가 있었지요. 대개 많은 물이 온 세상 만국에 푸른데, 크게는 배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과 같은 곳도 있고, 작게는 갈매기나 해오라기가 물결에 뜨락잠기락하는 곳도 있지요. 사람들이 온 세상 만국에 두루 퍼져 있는 것은 모두 물 가운데 있는 존재일 뿐이지요. 이 집 이름을 문양이 있는 물결이라는 뜻의 문의라고 한 까닭이 이것이라오. 당신은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주시지 않겠소.”

내가 이를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세상에는 정말로 그 실체가 없는데도 그 이름을 차지하는 것이 있다오. 이제 당신이 그 집에 이름을 붙인 것은 가히 그 실체가 없다 하겠소. 비록 그러하지만, 당신도 또한 할 말이 있겠지요. 이제 바다의 섬 가운데 집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반드시 물에서 산다고 하지 산에서 산다고는 말하지 않겠지요. 섬사람들 중에서 정말 담장을 두르고 집을 짓고 문을 닫은 채 들어앉아 있는 자는 매일 파도를 몸으로 직접 접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들이 물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 되겠지요. 이와 같은 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어찌 당신의 말만 의심을 품겠나요? 큰 땅도 하나의 섬이고, 중생들도 모두 다 섬사람이지요. 비록 배를 집 삼아 떠다니면서 매일 물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형편상 눈을 늘 한 곳에 고정시켜 움직이지 않게 할 수는 없을 것이고, 필시 잠시라도 시선을 움직일 것이요. 그러면 그 순간은 잠시 마음이 물에서 떠나겠지요. 반걸음 간 것이나 천리를 간 것이나 매한가지인 법이지요.

 이제 당신이 이 집에 거처하면서 물결이 찰랑거리는 것을 한 번 보고자 하는데,  비록 아침에 도성 안에 있다가 저녁에 강호로 나간다 하더라도, 늘 물에 눈길을 둘 수는 없는 것은 당신과 저 사람이 다를 것이 없지요. 저 사람은 길어도 눈 한 번 깜빡할 순간이고, 당신은 짧아도 아침에서 저녁까지 제법 시간을 두고 있겠지요. 눈 깜빡할 사이는 아침에서 저녁까지와 비교한다면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 오래 지속되는 측면에서 말한다면,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는 짧은 사이에도 이미 지나간 묵은 자취가 된다오. 그 오래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말한다면, 백 년이나 천 년도 하루아침과 같을 것이지요. 저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는 시간이 길고 백 년 천 년의 시간이 길지 않다면, 눈 깜빡하는 순간이 아침에서 저녁까지의 시간을 비웃을 것이니, 나는 그렇게 해도 좋을지 모르겠소. 누가 그것이 실체가 아니라고 말하겠소?”

 내 말을 듣고 어떤 이가 “당신의 말은 따져보면 그럴 듯하오. 그러나 내가 겁나는 것은 남들이 한수에게 산에 살면서 물고기와 자라로 예를 표한다고 책망할까 하는 일이라오.”라 말하였다. 이에 내가 “정말 이러하다면, 당신은 구양수(歐陽脩)의 화방재(畵舫齋)에서 뱃사공을 부를 수 있겠군.” 하고는 함께 크게 웃었다.  

ᅠ- 서영보, <문의당기(文漪堂記)>《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

<원문>
申漢叟名其堂曰文漪。送書於予曰。吾性樂水。而常恨闤闠中無泉池之觀。雖有觀水之術。無所於施。觀於天下地圖而有得焉。盖積水蒼然。九州萬國。大而如帆檣之布列。小而如鷗鷺之出沒。人之遍九州萬國者。皆水中物耳。此堂之所以名也。子其爲我記之。予見而笑曰。世固有無其實而處其名者。今子之名其堂。可謂無其實矣。雖然子亦有說。今有家於海島之中者。人必謂之居水而不謂居山矣。島人固亦有環墻而宮。閉戶而坐者。以其不日狎於濤淵而謂非居水不可也。如是者人皆知其然矣。而何獨疑於子之言乎。大地一島也。衆生島人也。雖浮家泛宅而日與水居者。亦其勢不能以駐眼不移。必有暫時移視而須臾無心於斯時也。跬步與千里一也。今子居於斯堂。而一欲觀乎水紋之淪漪也。雖朝於闤闠而將夕於江湖。其不能常目於水。子與彼無以異矣。或在於轉眄之久。或在於朝暮之頃。轉眄之比朝暮則有間矣。然盖將自其久者而言之。則俛仰之間。已爲陳跡。自其不久者而言之。則千百年爲一朝矣。夫俛仰之爲久。而千百年之爲不久。則以轉眄咲朝暮。吾不知其可也。夫孰曰非其實也。或曰子之言。辯則辯矣。雖然吾懼人之責漢叟以魚鼈爲禮也。予曰苟如是。子能喚渡於歐陽子之畵舫齋乎。相與大咲。

 

 서영보  「문의당기」  이해와 감상 작품해설

 서영보(徐榮輔, 1759-1816)는 본관이 달성, 자가 경세(慶世), 호는 죽석(竹石), 옥경산인(玉磬山人), 약산병리(藥山病吏) 등을 사용하였다. 학문과 문학이 모두 뛰어났고 신위(申緯), 이만수(李晩秀) 등과 절친하였다. 이 글에서 이른 신한수(申漢叟)가 바로 신위다. 신위는 서영보와 절친하여 함께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활발하게 토론을 한 바도 있다.
 

신위는 자신의 집 이름을 문의당이라 하였다. 문의당이라는 집 이름은 당시 문인에게 그리 낯설지 않았다. 왕세정(王世貞)의 엄산원(弇山園)에 문의당이 있었고 원굉도(袁宏道) 역시 같은 이름의 집을 두고 명문으로 이름난 <문의당기(文漪堂記)>를 지은 바 있다. 또 서영보의 후배인 이학규(李學逵) 역시 자신의 문집을 《문의당집(文漪堂集)》이라 하였다.
 신위의 문장과 글씨는 서영보보다 명성이 높지만, 벗에게 그 현액과 기문의 글씨를 서영보에게 부탁하였다. 신위는 자신의 집이 도성 안에 있지만, 큰 대지 자체도 하나의 섬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구양수(歐陽脩)의 화방재(畵舫齋)에서 확인된다. 구양수는 활주(滑州)에 폄적되어 있을 때 방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배 안에 있는 것처럼 서재를 꾸민 다음 그 이름을 화방재라 하였다. 문의당이나 화방재 모두 와유(臥遊)의 뜻을 담은 것이다. 
 서영보는 상대주의적 시각에서 모든 사람이 다 섬사람이라 하였다. 물이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살더라도 늘 물을 보고만 있지는 않기 때문에 어쩌다 물을 보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물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이 오히려 마음으로는 더 물과 가까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객관적 시간의 양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서영보는 말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말기에는 너무 진지한 듯하여 농을 던졌다. 《예기(禮記)》에 “산에 살면서 어별(魚鼈)로 예를 표하고 물가에 살면서 사슴과 돼지로 예를 표하는 것은, 군자가 이를 예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居山以魚鼈爲禮, 居澤以鹿豕爲禮, 君子謂之不知禮.)”라 하였다. 신위가 도성 안에 살면서 늘 물을 가까이한다 한 것은, 산속에 살면서 물고기로 예를 표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져놓고, 서영보는 구양수의 화방재가 정말 물속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반문하여 글을 마쳤다. 농으로 마침으로써 오히려 삶의 여유가 돋보인다. (출처: 이종묵,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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